유지(遺志) 그 -1  

개척의 아버지 최재한 선생은 영혼말대·자손만대의 길을 깨달으셨던 분이시다. 신의 용재로서 혼신을 다해온 선생이었지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자손을 통해 영원의 길을 빛내고 싶었던 것이다.

이 길의 진실을 몰랐을 때는 그렇게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일일지도 모를 영원에 대한 갈망이 더욱 간절해져 감은 진실이 아니면 깨달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혹자는 그런 이 길의 후계구도를 일러 세습이라 혹평하는 무리 또한 없잖다고 본다. 그래 세습이라고 치자. 그것이 세습이라 원성의 대상이 되려면 적어도 자신만은 세습을 답습하지 않아야만이 거짓을 면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길의 은인이란 속된 세상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고 생각는다. 세상의 은원(恩怨)이야 값으로 대가를 계산할 수 있겠지만 이 길을 이끌어 키워준 은인은 만대를 깨우쳐 구제케할 참 생명의 은인이다.

이 땅에서 이 길을 걷는 자 가운데 그 분의 은혜를 입지 않은 자 한사람도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만약 그 분이 고국을 구제하려 돌아오지 않았다면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며 절대구극의 가르침이 있는지조차도 이 곳에 들어와 귀를 쫑긋하게 이야기 들을 이유조차도 없을지 모른다.

식물인간(植物人間 : vegetative state)은 잠만 자고 있다. 그 분이 깨워주지 않았다면 이미 뇌사(腦死 : brain death)로 판정받은 植物敎(?)가 되어 뿔뿔이 헤쳐졌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볼 때 그 분의 은혜를 간과하고서는 이 길을 참답게 걷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우리 모두의 은인이 학수고대(鶴首苦待) 오매불망(寤寐不忘)하던 소원이 있다면 설사 그것이 나의 가치관과 달라도 들어주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도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선생의 소원은 이 길의 가치관이요, 천리의 본류인 셈인데도 구차한 이유를 붙여 길을 두고 뫼를 가기 위해 온갖 회유와 간계로 짓밟아 버렸으니 아! 이를 어쩌랴 어떻게 하는 것이 그나마 지은 죄값이라도 사할 수 있게될지...

그것도 그냥의 소원이 아니라 혼신을 다한 유언 - 아니 유언만으로는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 충분히 신임할 수 있는 위·아래와 함께 공증까지 한 그 유지를 헌신짝 버리듯 팽개쳐 버릴 수가 있을까 싶다.

아무리 공인이라 한들 고인에게는 유족이 우선이건만 철모르는 상주에게 잔이라도 올릴 수 있는 기회라도 주는 것이 그래도 종교하는 사람의 양심이라 생각했건만 영결식장에서도, 10년제 때도, 곧 닥아올 20년제 때도 그런 기미조차 없는 것만 봐도 그 진의를 알 수 있지 않은가.

뉘라서 이 기막힌 사연을 두고 내 일이라 생각해본 자 어디 한사람이라도 있는가 말이다. 그래도 은혜를 들먹이며 하늘땅을 운운하고 있으니 애닯지 않는가.

아무렴 나보다야 못한 자 한사람도 없건만 되어져오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며 당연한 듯이 역사왜곡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 안스러워 다시한번 神風을 기대해 보며 그 본말을 공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상처를 덧내기 위함은 절대로 아니다. 자칫 저 위대한 천리교인이며 개척의 아버지였던 선생의 업적은 아첨과 거짓에 묻혀 버리고 실제한 우리의 은인이 아니라 전설속에 묻힌 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말지도 모른다.

하여!
역사속에 갇혀 버린 그 분을, 책속에 갇힌 그 분의 신앙신념을 꺼집어내어 만인과 함께 함으로써 불굴의 투지와 용기와 영원의 뜻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 여겨 그 진실을 공개하고자 했던 것이다.

거짓은 진실에 다친다. 혹여 공개된 여러 사안에 다치는 자 어찌 없겠는가. 하지만 다 지나간 일들이다. 몰라서 따랐을 수도 있겠고 바람에 휩쓸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눈 앞의 이익에 가려서 진실이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고, 자칫 귀한 신앙이 다칠까봐 속에 두고도 말못했을 수도, 너무 작은 자(尺)이기에 수없이 계산이 바뀔 수도 있을 수 있었겠다.

허나 하늘·땅을 들먹여 영혼말대·자손만대를 구제하고자 그 모진 마디를 견뎌온 그 저력을 이제 이 길의 진정한 공통분모 창출을 위한 위해 혼신을 다할 수는 없을까!

 

대교회장과의 공증

그걸 파기하고 다시 공증

어느 감화에서 남기신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