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2. 밀항선

3. 유치장에서

4. 생장   

5. 나병(문둥병)

6. 병력과 전과력

7. 기이한 인연

8. 암흑의 수렁

 9. 악에 강한자

10. 악전침대

11. 첫참배

12. 교회의 사정

13. 수양과에서

14. 교회생활

15.경찰에 잡혀

16. 인연과의 전쟁

17.마디를 딛고

18. 포교소설립

19. 봄은 오다

20. 일진강풍

22.고국을 향해

23. 고성·충무교회

24.시험과 박해

25. 박해와 통합

26. 나심

27. 지바를 흠모

28. 에필로그

하늘을 나는 독수리 : 마디를 딛고

1949년의 춘계대제의 날(1월 26일) 최재한은 갑자기 오한을 느끼고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는 고열로 쓰러졌다. 이상한 발열은 40여일이나 계속되었다. 전신이 깔아지고 고열 때문에 사고력 마저 희미해져 이대로 죽음의 심연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될 만큼 또 다시 유명(幽明)의 경지를 헤매는 꿈같은 나날이 그의 심신을 괴롭혔다. 그 고열로 인하여 겨우 양호한 상태로 향하던 한센씨병(나병)이 다시금 기세를 회복해 왔음을 그는 느꼈다. 육체의 고통보다도 오히려 정신적 오뇌쪽이 더 심각하다는 것을 그는 경험한 바 있다.

이 1년 동안에 그의 전도를 받아 도움을 받고 신앙에 이끌린 많은 신자 가운데에는 그의 병이 재발하는 기미를 느끼고 동요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장본인인 최재한 자신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한번은 죽었던 목숨이고 하늘에 돌려드린 몸인 것이다. 어버이신님은 그 목숨과 신체를 그의 신앙과 인연자각과 남을 구제하는 실천을 담보로 다시 한번 빌려 주셨던 것이다. 그것이 1년 남짓하여 다시 이런 중태에 빠지게 된 것은 과연 병의 재발인 것일까. 의학상으로는 분명히 재발이었다. 그러면 신앙상으로는 어떻게 깨달아야 할 것인가...!

담보의 기한이 다된 것일까.
아니, 누가 보아도 그는 어버이신님의 의도에 따르겠다고 포교의 선단에 서서 사자분신의 활동을 해 왔다. 지금까지 보다 더 많은 담보를 장만하라고 한들, 어찌 할 수 없는데까지 그는 극한의 힘을 짜내어 전도에 정혼을 기울여 왔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젠 누워서 천명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 최재한 자신의 참회와 술회를 들어보기로 하자.

[理를 모르는 사람들은 나의 병을 보고 재한이란 놈이 또 나쁜 짓을 해서 저 병이 재발된게 아니냐고들 수근거렸지만, 과거가 과거니만큼 그런 말을 들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깨달았습니다. 한번 이미 죽었던 몸을 구제받고 나서는 전도구제를 통하여 다소나마 좋은 일을 해 왔으니, 어버이신님께서 마지막 마무리 수호를 주시는 조짐으로써 이때까지 몸에 숨어 있었던 병균을 말끔히 밖으로 내보내 주신 것이라고....,

그토록 악화해 버린 이 병이 반년이나 1년으로 깨끗이 나을 리가 없는 겁니다. 일심으로 신님의 일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동안에 이놈이 어디까지 약속을 지킬 수 있는가. 얼마나 해낼 수 있는 마음이 되어 있는가를 늘 살펴 보신 결과 어쩌면 죽을 때까지 불변한 마음으로 관철할 듯한 근성을 갖고 있어 보이니 여기쯤에서 한번 휴식을 주고 진짜로 건강한 몸으로 고쳐 주어야겠다는 의도에서 남아있는 더러운 것을 전부 밖으로 내보내 주시는 것이라 생각했었지요.]

참으로 무서운 자신력이다. 빈틈없는 실천가라야만 말할 수 있는 진실의 말일 것이다. 강한 마음도 이쯤되면 신님과 대등한 입장에서 교류하고 있을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 그렇게 생각되는 ㅡ강한 의지력을 그는 어떤 식으로 형식화했는가. 환언하면 작정한 마음을 어떤 상태로 구현하고 실천했던가. 실천은 사상의 공표(公表)이며 완성이다. 누워서 생각하는 것은 횡와(橫臥)의 사고(思考)로써 일어선 자세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서는 실천에 이어지질 않는다. 실천에서 생겨나는 체험적 사고야말로 목전의 벽 건너에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다음의 사고(思考)를 부르고, 그것이 거듭된 연후에 자신의 혼(인연)의 테를 넘어서는 새로운 선망이 열린다.

그는 고열을 무릅쓰고 이부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이 캄캄해질 듯한 고통을 참으면서 이른 봄의 찬 바람을 견디며 오사카 역두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3월 초순께,. 터질 듯한 목소리를 짜내며 잡도속의 군중을 향해 어버이신님의 수호를 설파했다. 설파한다기 보다 한껏 절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풍에 얻어맞은 빰은 더한층 검붉게 부어올랐다. 오한은 더 심해지고 가슴의 고동은 마치 험한 산길을 오를 때처럼 숨결이 격해져 앞이 막힐 듯한 고통이 엄습했으나 그 고통이 뼈에 스며들수록 그는 그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어버이신님의 수호에 감사를 드리며 더욱 분발했다. 생사는 어버이신님의 의도에 달려 있다. 그 의도에 맞느냐 안맞느냐의 분기점에 서서 이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믿는 포교의 최선단에 몸을 던졌던 것이다. 여기서 죽으면 진짜로 순교자(殉敎者)가 되는 것이다. 이 몸으로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되면, 그 때가 자기 인생의 끝장이라 생각했다. 썩어가는 육체와 분발하는 정신과의 극단적인 언바란스의 투쟁이었다.

그는 그 동안 교회 신전에 엎드려 다음과 같이 맹세했었다.
1. 앞으로 3년 천날 동안 어떤 일이 있어도 여성은 쳐다보지 않겠다.
2. 그동안 술은 물론 담배도 끊는다.
3. 그동안 생선도 육류도 먹지 않는다.
오사카 역두에는 3일간 계속 다녔다. 하루 하루가 아니 한시간 한시간이 죄업과 대결하는 진지한 긴장의 연속이었다. 긴장이 풀리면 바싹 쓰러질지도 모른다.

아침마다 냉수를 뒤집어쓰고 신전에 기원하고 아침 밥도 먹는둥 마는둥 하며 교회를 나온다. 식욕을 잃어 밥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목숨을 걸고 지망한 난행고행이었다. 배는 바짝 고팠고 다리는 덜덜 떨려 도중에서 바로 서서 걸을 수가 없어 자신도 모르게 길바닥에 손을 짚고 기어다닌 적도 있었으나 가로수에 기대거나 전주를 의지하거나 하면서 겨우 목적지에 당도하는 일도 있었다. 가까운 곳에서 해도 될 일을 유별나게 오사카 역두로 결정한 것은 이곳이 칸사이(關西)에서 사람들의 출입이 가장 현저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저녁 나절, 교회로 돌아오면 또 물을 뒤집어 쓴다. 이른 봄에는 그것만이라도 기력없이는 어려운 행위이다. 저녁 근행을 마치면 그 때가 하루일과가 끝나는 시간이었다. 저녁을 먹을 기력도 없고 쓰러질 듯 이부자리에 들면 아침까지 혼수상태에 빠졌다.

온 몸에 스며있는 독(毒)과 오물이 무모한 짓이라 생각되는 이 난행고행 도중에 다 나와 버렸는지 수일 후 그는 이상하게도 기분이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다. 아침근행을 마치고 오랜만에 식사를 조금 들 수 있었다. 밥맛을 느꼈다. 된장국이 맛이 있었다. 밥그릇에서 은은히 오르는 따듯한 김이 얼굴을 감쌌다. - 아아 살고 있구나. 살려주신 거구나! 이 수기와 온기, 만신창이로 찢어질대로 찢어진 이 몸뚱이도 수기와 온기로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 뜨거운 눈물이 밥그릇에 뚜둑뚜둑 떨어져 내렸다.

어느 감화에서 남기신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