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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기 참배  

초대의 10주기에 후계자인 최효석은 불시에 참배했다. 충격을 받은 **長은 쓰러졌으니 -

돌이켜 그날을 더듬어 10년 전을 회상해 보면 새삼 회한에 휩싸인다. 그래도 다른 해도 아니고 돌아가신지 10년제의 의미는 보통때의 그날과는 다르다고 생각해 보았다. 물론 해마다 맞이하는 출직의 그날을 되새기며 제사를 모셔오지만 이 길은 10년제 20년제 그리고 100년제 등에다 그 의미를 크게 부여하고 있지 않은가.

선생의 한많은 유지는 칼잡은 손에 의해 물거품 된지는 오래라 생각하고 있었다. 공식석상에서 八木大敎會는 초대와 성(姓)이 다른 것이 대교회의 특징된 인연이라 애써 강조해 왔으며 강습회 때는 초대(初代)와 姓이 다르게 이어진 대교회의 역사를 심어주기까지 했었다. 실로 기획된 프로그램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10년제!
그날은 10년 전 1983년 10월 19일 숙환으로 출직하신 이 땅의 개척자이신 최재한 선생의 기일을 말함이며 이는 평소의 기제사와는 달리 준비된 행사였다. 초대의 흡인력있는 용기를 될수록 덮어두고 싶었겠지만 초대가 설립한 교회이기에 아무래도 명분없이는 불가능함을 느꼈기에 10년제는 피할 수 없는 하나의 과정이었으리라.

그런 명분으로 초대된 순서들에 의해 정통성을 인정받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과정인 점을 생각해서라도 피할 수 없는 10년제이며 맞물린 동삼동에서 성대하게 집행될 행사에 뒤쳐질 수는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대한 행사임이랴.

천리교는 최재한 선생의 유지(遺志)파문으로 출직하기전부터 외환관리법 등이 적용되는 민형사 소송으로 일대 파란을 겪었었다. 출직하기 2년 전 즉 1981년 6월 29일에 영남합동법률사무소에서 후계자 공증(등부 제 1801호) 내용이 알려지면서 그 파란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었으며 이에 반 최재한과 반 대행자(후계자 섭행자) 바람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것은 교회장 유고시에 그 직을 대행할 자가 잘못 선정되었으므로 이를 번복하라는 협박(?)이 숙환에 계신 최재한 선생을 괴롭히게 되었는데 [나를 죽여도 대교회장과 함께 공증한 것의 파기는 절대로 안된다]며 완강히 거절하는 선생을 흉기(?)로 위협까지한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참으로 용기의 화신이라 일컬었던 그였지만 숙환에 시달리고 힘의 누수 현상이 종지(終止)에 다달은지라 결국 최기대, 이병석, 최수열, 이병오, 이응석씨 등에 의해 교회장을 대행하라는 또 다른 공증(공증인가 : 부산합동법률사무소, 등부 : 제 3282호)을 위해 出直을 6일 앞둔 1983년 10월 13일 김희규, 박원일, 최동준이 입회한 가운에 약정 대리인 대표에 김희규가 기명날인하여 영남공증(등부 제 1801호)을 파기하게 만든 하극상이 이뤄졌던 것이며, 대교회장이 함께하여 정통성이라 인정한다면 일본을 끊고, 복원이라는 명제를 내세워 당시 교통까지 협박하여 교령을 발포하게 하였던 우여곡절의 과정을 넘었던 것이다.

이후 유골(?)문제의 민감한 사안등과 겹쳐 결국 원남성은 양분되었으며 崔南星과 許南星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10년제를 맞은 그 날까지의 우여곡절이란 필설로 다할 수는 없겠으나 차츰 다 밝히지 않을 수 없다고 사료된다.

하여!
평생에 단 한번밖에 맞이할 수 없는 10년제의 뜻깊은 행사장에 누구하나 초대의 핏줄이요 유일 상주인 후계자에게 참배를 권하는 자가 이쪽 저쪽을 불문하고 없을 것으로 예측하고는 당당하게 아버지 영전에 참배할 수 있게 되기를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었다.

아무리 天恩을 배반할지라도 초대의 유지를 완전묵살할 수만은 없으리라 여겨 언제인가 [아버지의 유지]를 들먹이며 천리교할 것을 권할 형식을 밟지 않고서는 법을 떠나 양심이 허락되지 않을 것이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어떻든 유지를 따르겠다]는 답은 간단한 것은 아니다. 천리교 집안에서 자라 천리교를 天命이라 교육시켜도 어려울 일일진데, 기약없이 팽개쳐놓은 아이에게 그런 답을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그들의 간계를 통찰하고는 그 교육을 위해 담당자가 되기로 의논이 모아졌으며 10년제의 그날 그분(초대의 생질 : 김도성)이 후계자를 대동하여 참배시키기로 굳은 약조가 되었던 것이다.

김도성과는 신앙을 갖기전부터 알고지낸 사이로써, 교회가 양정동 있을 때 후계자 가족 등의 생계 및 학비보조를 요청한 역원들의 반대결의에 긴가민가했던 속셈이 완연함에 후계자 교육이 언급되어 본인이 그 적임자가되어 장계취계(將計就計)에 들어간 것이었다.

10년제에 참배하기로 임의결정은 되었으나 무작정 참배보다는 참배하겠다는 통지를 하는 것이 그나마 도리라 여겨 심부름 보냈던(?) 그가 그만 매수되어 대동(帶同)하겠다는 약속은 깨어지고 10년제의 아침(여태)까지 소식은 두절되고 말았던 것이다.

아마 그 때 그 양반만 매수(?)되지 않았던들 오늘날 그가 다시 쫓겨나지는 않았을지도 모를 일인데 생각해보면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다른 지인을 알선하여 예정된 스케줄대로 10년제의 행사장에 초대가 학수고대한 그가 나타나 위 사진처럼 보무도 당당하게 참배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참으로 신기하고 감탄한 일은, 순서에 따라 참배가 이뤄졌는데 元和分敎會長의 참배가 있자 그가 사회자의 소개도 없이 불쑥나가게 되었으니 만장한 분들의 놀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리라. 영전에 다가간 그를 보고 뒤늦게야 사회자의 소개가 간단히 있었지만 차마 끌어내어 쫓아버리고 싶었겠지만 그럴 수는 없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다만 참배시간이 길다며 [빨리 일어나지 않고 뭣하느냐]며 호자로 짐작되는 분의 호통이 있었다고 전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졸지의 사정에 충격받은 長은 비틀거려 잠시 쓰러졌었고 이를 안타까이 여긴 대교회장은 [후계자는 역원의 결정 사항]임을 천명하게 되었던 것인데 역원들로서는 초대의 유지를 언급할 그런 용기나 엄두도 없다고 볼 때, 초대의 유지를 예나 지금이나 물건너간 사정으로 치부하기는 이미 동강낼 순간부터, 초대가 출직하기 이전부터의 문제였던 것이다.

이제 교조120년제 삼년천일 시순에 선생의 20년제를 목전에 두고 있다.
10년제와 교조 110년제를 즈음하여 불게됐던 神風에 버금갈 커다란 토네이크성 회오리가 20년제와 교조 120년제의 시순에 어떻게 일 게 될지는 아무도 예측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이번의 신풍 규모는 점으로써 도려내는 바람이 아니라 면으로써 만인을 살리는 바람이 확실하며 이를 계기로 초대의 뜻이 새롭게 부상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 바람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이 곳을 방문하여 용기있는 견해를 남겨 모든이의 올곧은 생각을 공론화함에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생각은 천근이더라도 한 생각을 표현치 못한다면 썩은 생각일 뿐이다. 진정 초대의 그 엄청난 기백으로 이뤄낸 오늘에 살고 있다고 깨닫는 자가 있다면 주저치 말자.

작은 생각이 모여 큰 뜻이 반드시 이뤄지게 된다고 볼 때, 선생의 간절한 소망은 사욕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간절한 소망이기에 용기있는 결단이 함께하기를 기대해 본다.

 

立敎 166年 10月 1日

공증서류1
공증서류2

어느 감화에서 남기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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